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그림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프랑스의 어느 꽃집
    카테고리 없음 2022. 3. 3. 16:25

    프랑스 여행을 하던 중 길가에 아른다운 집 한채를 발견했다.

    집앞의 꽃들과 간판을 보고 꽃집이라는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꽃과 함께 어울어진 정겨운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본다

     

    프랑스의 꽃집 실제 모습

    프랑스 건물 그림을 그리고 프랑스 미술사을 돌아본다

    프랑스 르네상스

    15세기에 있어서 프랑스는 샤를 6세의 패배와 잇달은 내전과 영국군의 침공 등으로 왕가는 여태까지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파리를 대신하여 몇몇의 지방과 도시가 그 시기의 회화의 중심지로 되었다. 

    프랑스의 남부인 프로방스 지방은 이탈리아와 카타로니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플랑드르 미술도 그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여러 경향을 내포하면서 프로방스의 독특한 작풍(作風)을 만들어 냈다. 

    브뤼주를 중심으로 하는 루아르 계곡은 프로방스 지방 이상으로 플랑드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4세기 후반에 있어서 프랑스에는 디종과 물랭, 그리고 브뤼주에서 많은 플랑드르의 화가가 활약하고 있었다. 

     샤를 8세와 루이 12세 및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정복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의 취미를 유입시켰다. 특히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앙드레아 델 사록토 등의 미술가와 그리고 많은 작품을 받아들였다. 퐁텐블로 성관(城館)의 건립과 그 장식을 담당한 이탈리아 미술가와 또한 그들에게서 배운 프랑스의 미술가는, 이탈리아의 모방에서 출발하여 점차 독자적인 고아한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서 '퐁텐블로파'를 형성하였다. 한편으로, 플랑드르계의 초상화가도 정밀하고 세련된 작품을 제작하여 왕후와 귀족에게 환영을 받고 있었다. 

     

    17세기

    17세기 초두에는 후기 마니에리슴의 제2차 퐁텐블로파가 활약하고 있었다. 이 파는 프랑스의 고전주의 경향을 육성한 점에서 간과될 수 없으나 새로운 회화는 1727년에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시몬 베(1590∼1649)에 의해 전하여졌다. 그는 루이 13세의 궁정화가로서 17세기 전반을 리드했다. 그 화풍은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는 명암을 대비케 하는 카라바조적인 것이었으나, 귀국 후에는 함축성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으면서도 밝고 화려한, 다시 말하면 비교적 온화한 바로크풍의 장식화를 그렸다. 제자에는 르브룅·미냐르·르사에르 등이 있었던 점에서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18세기

    데생 중시의 푸생파를 누른 색채파는 루벤스나 반다이크 등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 풍부하고 섬세한 색채를 쓰며, 또 그 기원을 베네치아파에서 구했다. 이와 같은 색채와 감각으로 지향하는 풍조는 말하자면 국제적인 경향이기도 하였다. 종교화는 점차 쇠퇴하여, 그 내용이 빈약한 것이 되어가나, 그 중에서 장세니스트인 쥬브네가 뛰어난 작품이다.

     

    고전주의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 시대는 향락에 빠진 왕조를 공격하고, 건국 이상을 고대에서 찾았고 다시 나폴레옹 시대에서는 로마제국을 이상으로 했기 때문에, 미술에서의 고대 숭배도 압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소재도 고대에서 취하여 애국·영웅·교훈적인 장면을 그린 작품이 제작되고, 그것들은 국가나 사회가 요망하는 것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서 존중되었다. 그러나 그 주의는 당초부터 전대의 일락에의 반동에 입각했으니 만큼 타협 없이 엄격하였고, 고대를 존중한 나머지 그 형식적인 모방에 결부되어, 화면의 인물을 고대 조각과 같은 인상(人像)으로 그리고, 다시 동작도 조각적인 동작으로 그리는 수법에까지 이르고 있다. 

    신고전주의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왕조의 부활을 맞게 되자, 거국적인 영웅주의도 냉각되고,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나 동시에 다비드의 실각으로 그 엄격한 고전주의도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된다. 그때 다음의 지도자로서 등장한 사람은 앵그르였다. 앵그르는 다비드에 못지않는 철저한 태도로 흠이 없이 곱게 다듬은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있다. 그 주장은, 나중에는 각별히 아름다운 사물을 한층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이 곧 미술의 사명이라고까지 강조하고 있다. 제작에 있어서 고전처럼 윤곽을 올바르게 그리고 고전처럼 미를 희구하는 정신은, 앵그르를 중심으로 화단을 압도하여 널리 퍼져갔다.

    낭만주의

     

    혁명시대에 넘쳐 흘렀던 고대의 애국정신이나 제정시대에 보급된 고대의 영웅정신은 차차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여, 1800년에 이르면 그 반동으로서 낭만주의가 탄생한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 무렵부터 중세의 이야기나 이국정서 등에 비상한 흥미를 모으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위압적인 경향에서 놓여나 인간의 자연적 욕구인 자유·정열로 내닫는 것이지만, 미술의 경우는 단지 제재를 문학이나 정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신적인 사상을 뿌리쳐 감정을 자유롭게 토로하고, 그 내용이나 색채에 훨씬 정열을 의식케 하는 표현을 찾아 나아가고 있다. 

    자연주의

    다비드의 고전주의에서 시작하여, 역사나 문학 등의 소재가 많이 그려지는 동안 누구나 느끼는 것은 자연으로의 복귀나 예찬이 확실히 적은 일이었다. 자연은 예술의 스승이며 그 원천인 것이다. 그 자연을 낭만적으로, 꾸며진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솔직하게 관찰하여 자연에서 직접 받는 감명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는, 19세기 전반에는 풍경화가 미셸(Georges Michel, 1763∼1843)을 낳았는데, 미셸은 코로가 나옴에 이르러 참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인상주의

     

    인상파는 1874년 4월에, 파리 카프신가의 전 나다르 사진관을 회장으로 하여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피사로모네시슬레드가세잔르누아르모리조기요맹 등이 모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 협회전이라는 것이었는데, 회장에 우연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고 명명한 작품이 있어, 그것을 들어 잡지 ⟪샤리바리⟫의 비평가 르로아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一黨)이라는 데에서, 인상파라고 야유한 연유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 인상파는 1886년 제8회전까지 계속되는데, 최초에는 압도적인 매도로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고갱이나 고흐도 참가했다. 19세기 말기에는, 살롱 화가에도 앵그르 시대의 단정함과 위엄이 결여되고, 틀에 박힌 관념에서 차갑고 깨끗이 그릴 뿐 완전히 막다른 곳에 부딪치고 있었다. 인상파는 그 교착 상태에 활로를 열어 참신성을 주입하고, 회화는 그것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현대로 향했다.

     

Designed by Tistory.